사신 공주와 이서관의 괴물 (잔혹동화, 세계관, 조작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흑백으로 처리된 배경에 종이 질감이 살아 있는 독특한 화면을 처음 봤을 때, 그냥 분위기 게임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플레이를 시작하니 각 이서(異書)에 담긴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한 편의 어두운 동화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니폰이치 소프트웨어의 그림책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이 게임은 이야기로서는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게임으로서 받아들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잔혹동화로서의 세계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전작인 거짓말쟁이 공주와 눈먼 왕자 시리즈의 연장선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신 공주와 이서관의 괴물은 옴니버스(omnibus) 형식을 택했습니다. 옴니버스란 독립된 짧은 이야기 여러 편이 하나의 큰 틀 안에서 연결되는 구성 방식을 말합니다. 덕분에 단일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전작보다 훨씬 다양한 인물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각 이서는 사신병(死神病)에 걸린 소녀들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공간입니다. 사신병이란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림책의 형태로 바꾸고, 끝내 종이로 된 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설정 속 불치병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국가도 포기한 채 이서관이라는 수용 시설에 격리되는데, 이 설정 자체가 사회적 방임과 고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처럼 읽혔습니다. 학대, 죄책감, 고립처럼 어린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들이 기괴한 동화의 언어로 번역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잔혹 동화라고 하면 자극적인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작품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몇 장의 삽화와 절제된 내레이션,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사건을 짐작하게 만드는 방식이라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직접 보여주지 않아서 오히려 상상으로 채우게 되는, 그 여백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흑백과 색의 대비를 게임의 규칙으로 연결한 것도 단순한 미술적 선택 이상이었습니다. 색이 있는 부분은 상호작용이 가능하거나 감정이 되살아나는 순간이고, 흑백으로 처리된 공간은 생기를 잃은 세계를 나타냅니다. 시각 언어(visual language)란 색이나 형태처럼 말이 없어도 의미를 전달하는 시각적 표현 체계를 말하는데, 이 작품은 그 시각 언어를 게임 메커니즘과 일치시켰습니다. 이 점은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기존 팬에게도 확실히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인물에게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고통을 부여하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조금 걸렸습니다. 작품이 구원과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만, 그 결말의 따뜻함보다 그전까지 쌓인 고통이 더 오래 남는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도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장면을 본 뒤 긴 여운이 남긴 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이 과정을 겪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세계관은 훌륭한데, 조작감이 발목을 잡습니다

게임의 핵심 발상은 '부술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주인공 모노의 파트너인 염소 괴물 메르헨디아(메르)는 흑백으로 그려진 종이와 장애물을 먹어치우고, 먹은 것을 다른 곳에 토해내어 발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노 역시 리터치(retouch)라는 능력을 씁니다. 리터치란 색이 있는 부분에 간섭해 사라진 사물이나 무너진 세계를 다시 그려내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림책을 물리적으로 고쳐가며 길을 만든다는 발상은 작품의 형식과 잘 맞아 처음에는 꽤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플레이해보니 이 조작이 생각보다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메르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이다 보니, 플레이어가 조준한 위치뿐 아니라 메르가 서 있는 위치와 방향까지 판정에 영향을 줍니다. 분명히 범위 안에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먹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의 장애물을 노리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퍼즐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조준 판정 때문에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할 때는 문제를 풀었다는 만족감보다 조작을 겨우 통과했다는 피로감이 먼저 왔습니다.

죽음팡이로 막힌 길을 종이먹기로 제거할 때 특히 그 문제가 두드러졌습니다.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장애물을 먹었는데도 아주 작은 조각이 가장자리에 남아 이동을 막는 경우가 꽤 있었고, 남은 조각이 배경과 잘 구분되지 않아 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지 바로 파악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폭주 시스템(runaway system)도 아쉬웠습니다. 폭주 시스템이란 메르에게 계속 먹을 것을 주면 게이지가 차오르고, 한계를 넘으면 통제를 잃는 긴장감을 만드는 장치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메르는 언제든 모노를 배신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인데, 실제 게임에서 폭주는 버튼 연타로 쉽게 진정되고 맵을 이동하면 곧바로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 때문에 긴장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야기에서 폭주 장면이 비장하게 연출될 때도 이미 너무 자주, 가볍게 경험해버린 탓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아래는 제가 플레이하면서 조작과 UI에서 실제로 불편했던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1. 메르에게 명령 시 조준 판정이 미묘해 원하는 대상을 여러 번 다시 겨냥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2. 죽음팡이 장애물 제거 후 남은 잔여 조각이 이동을 막지만 배경과 구분이 어렵습니다.
  3. PS5판 기준 종이먹기에 가장 자주 쓰이는 버튼이 L1인데, 장시간 플레이 시 왼손 검지 피로가 상당히 누적됩니다.
  4. 메르에게 지시할 때마다 모노가 동일한 음성을 반복 재생해, 수집 요소를 정리할 때 특히 귀에 거슬렸습니다.
  5. 지도 확인 시 오른쪽 스틱과 왼쪽 스틱의 역할 구분이 직관적이지 않고, 기억의 책갈피 메뉴가 항상 처음 화면에서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원하는 기록을 찾기 번거로웠습니다.

게임 플레이 디자인(game play design), 즉 플레이어가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전반의 설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와 분위기의 완성도에 비해 조작 경험의 완성도가 아쉽게 따라오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Metacritic의 사신 공주와 이서관의 괴물 페이지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평가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분량, 짧다는 것보다 빈약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인디풍 어드벤처 게임의 플레이 타임이 짧다는 것 자체는 큰 단점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은 단순히 짧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본 엔딩까지 천천히 플레이해도 7~8시간, 수집 요소를 모두 챙겨도 10시간 안팎인데, 그 안에서 제공되는 상호작용의 종류 자체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퍼즐은 새로운 규칙을 이해하고 나면 대부분 눈앞에 보이는 정답을 그대로 실행하는 수준에 머뭅니다. 동료들의 대화가 해결 방법까지 알려주는 경우도 많아 오래 고민할 만한 상황이 드물었습니다. 각 이서를 다시 살펴볼 이유도 크지 않았고, 클리어 후 추가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역시 모습과 목소리 외에는 기존 플레이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본편에서 구해낸 사신 공주들의 후일담이나 난이도가 높은 추가 퍼즐 같은 요소가 있었다면 이야기의 여운을 이어가며 게임을 조금 더 붙잡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게임 저널리즘 분야에서 오랫동안 게임을 분석해온 IGN 코리아의 리뷰에서도 짧은 분량과 빈약한 클리어 후 콘텐츠를 단점으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리플레이어빌리티(replayability)란 한 번 클리어한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고 싶게 만드는 요소들의 총합을 말하는데, 이 작품은 그 부분이 특히 약합니다. 이야기의 결말도 하나로만 수렴하고, 선택에 따른 분기나 추가 이서 같은 요소도 없어 한 번 플레이로 모든 것을 본 뒤에는 다시 시작할 동력이 거의 남지 않습니다.

물론 모노와 메르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는지 지켜보는 것은 끝까지 게임을 붙잡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용하려는 불편한 계약으로 시작했다가 조금씩 변화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각 이서의 무거운 이야기 사이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균형추 역할을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의 힘은 충분했기 때문에, 게임적 완성도가 조금 더 뒷받침됐다면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더 크게 남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사신 공주와 이서관의 괴물은 전작을 플레이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나요?

A. 네, 독립된 작품으로 즐기기에 충분합니다. 세계관과 설정은 이번 작품 안에서 모두 설명되기 때문에 전작을 모르더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시리즈 특유의 잔혹 동화 분위기와 인간과 이형의 존재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 빠르게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액션 게임이라고 봐도 되나요, 아니면 어드벤처에 가깝나요?

A. 일반적으로 능력을 활용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액션 게임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 경험상 이 작품은 어드벤처, 그중에서도 이야기를 읽는 경험에 훨씬 가깝습니다. 전투는 긴장감이나 숙련을 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고, 퍼즐도 난이도가 낮아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입니다. 액션의 손맛이나 도전적인 퍼즐을 기대하고 접근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플레이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A. 기본 엔딩까지 천천히 플레이해도 약 7~8시간, 기억의 책갈피나 종잇조각 같은 수집 요소를 모두 챙기면 10시간 안팎입니다. 클리어 후 추가 콘텐츠는 사실상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번의 플레이로 대부분의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Q. 잔혹한 내용이 많은 편인가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도 괜찮을까요?

A. 학대, 방임, 고립, 죄책감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것은 맞지만, 자극적인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상징적인 연출과 절제된 내레이션으로 전달합니다. 그럼에도 각 이서마다 인물이 거듭 바닥으로 밀리는 전개가 반복되기 때문에, 무거운 감정이 누적되는 방식에 민감한 분이라면 중간중간 쉬어가며 플레이하는 것을 권합니다.

Q. 시리즈 팬이 아닌 일반 플레이어에게도 추천할 수 있나요?

A. 이야기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작감의 불편함과 짧은 분량, 빈약한 클리어 후 콘텐츠를 감안하면, 정가보다는 세일 시즌에 구매하는 것이 더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신 공주와 이서관의 괴물은 한 권의 어두운 동화로서는 분명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흑백과 색의 대비로 구현된 기괴한 미술, 절제된 내레이션과 음악, 그리고 모노와 메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선은 플레이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다만 게임으로서의 완성도, 특히 조작 판정과 콘텐츠 밀도 측면에서는 이야기의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깊이 있는 퍼즐보다 감정을 따라가는 이야기 경험을 원한다면 충분히 권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 전에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kr.ign.com/the-grimm-reapress-and-the-drearytale-monster/15432/sasin-gongjuwa-iseogwanyi-goemul-ribyu